“장애인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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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목사, 밴쿠버밀알선교단 단장)

Aug. 1, 2010

장혁과 이다해가 주연한 드라마 [추노]가 한동안 브라운관을 달구었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어쩌면,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감동과 이야기 거리를 준 드라마였다. 도망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쫓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람”이고 싶어서 짐승의 길을 택한 대길과 “짐승”이 되어서라도 사람으로 살고 싶은 철웅, 암흑 같은 세상에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노비들의 이야기는 노비제도가 존재하던 그 시기도 결국은 사람들이 사는 시대였음을 생각하게 하였다. “노비를 노비”로만 보았기에 가슴 아픈 불행이 있었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노비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으리라.


“여자는 여자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틀린 것은 아니면서도, 불완전한 개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의는 여자를 “여자”라는 고정관념의 틀에 가두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이기 때문에 가능성을 제한 받게 되고, 어떤 기회를 얻지 못할 수가 있다. 여자라는 것으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또 “여자” 스스로도 그 사회적 통념의 틀에 갇혀 버리게 된다. 여자로서 “해야 한다”, 또는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유, 무형의 학습된 한계 안에서 살아가고 만다. 물론 이런 틀이 가져다 주는 유익 혹은 이익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자이지만 여자만이 아니고 사람이기를 원하고, 사람이되 여성인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한 여자들이 있어 왔다. 그들의 이런 자각과 인식은 여성의 존재와 가능성을 확대해왔고, 인습의 굴레를 벗고 자유의 지경을 넓혀서 여성의 인권과 여자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을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사실은 남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남자다”라는 말은 얼마나 불완전한 개념인가? 그리고 얼마나 억압적인 사고인가? 예를 들어, “남자는 남자다”라는 생각은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명제를 만들어냈다. 울 수 없는 남자는 감정에 어려움이 생기고, 모가 나고 틀어지게 되고, 마침내 폭발하거나 왜곡된 형태로 표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반면에 남자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는 것과 울지 않는 문제로 억압하지 않게 된다. 남자는 남성인 사람이다. 이 때, 남자는 보다 편안하며 자유할 수 있고, 보다 많은 가능성을 계발하며,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전체로서의 우리, 혹은 사회는 보다 나은 유익을 얻을 수가 있다.


이 사실은 장애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장애인을 장애인으로만 바라볼 때, 그것은 편견을 낳는다. 예를 들면,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 열등할 것’이라거나, ‘나와는 다른 어떤 존재’라고 생각한다. ‘정상적인 혹은 일반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나(우리)와 같은 그룹 혹은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함께 있는 것을 힘들어하거나 꺼려하고 배척하기까지 한다. 또 다른 면으로는 장애인을 동정과 구제와 시혜의 대상으로서만 자리매김을 하는 것을 들 수가 있다. 이런 일들은 장애인을 장애인으로만 생각하는 전제가 만들어낸 모습들이다.


오늘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장애인은 사람이다”라는 사실이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 장애인은 사람이기 때문에 비장애인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똑같은 희로애락을 느끼며, 똑같은 필요를 가지고 있다. 친구가 필요하고, 교육이 필요하며, 공동체가 필요하다. 때로는 커피숍에 가서 차를 마셔야 하고, 때로는 야외에 나가 자연을 즐기고 싶을 때도 있다. 또 일이 필요하고, 자기에게 맞는 일을 잘 해낼 수도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모든 사람이 존엄하고, 각자의 사명이 있고, 사랑 받는 특별한 존재라고 가르친다. 남자든, 여자든, 장애인이든,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다. 이런 인식의 전환과 이해가 많은 차이를, 아름답고 긍정적인 많은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