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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칼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려고
이상현 (목사, 밴쿠버밀알선교단 단장)
Mar 1, 2021
삶에는 불행이 있지요. 사실, 누구나 불행스런 일을 겪는다. 시기의 차이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불행은 또 찾아온다. ‘사람의 불행은 죄 때문입니까?’ 누구도 원하지 않을, 그리고 당사자도 결코 원하지 않았을,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이를 보고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 일행은 실로암 연못이 멀지 않은 예루살렘의 어느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 길 옆 어딘가쯤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는 실은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상태로 출생한 사람이었다. 제자들은 이 사람에 대한 정보를 어느 만큼은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제자들은 이렇게 물었다.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가 있어서 이렇게 된 겁니까? 이 사람 부모의 죄가 커서 저렇게 된 겁니까?” 제자들의 이 말이 그 시각장애인의 귀에도 들려왔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은 것이었으나, 그 말은 저의 귀에도 들려왔습니다. 비록 시각은 장애를 입고 태어났지만, 듣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요. 예수님을 따라다닌다는 그 사람들의 말은 참 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눈에 눈물이 차올랐지요. 그 눈물만큼, 많이 아픈 말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오늘 처음 들은 것도 아닌데, 이런 말은 들을 때마다 아프고, 마음에도 생각에도 깊게 생채기를 냅니다. 말은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것 같지만 사라지는 게 아니고, 사실은 가슴에 깊이 남는 게 ‘말’인 것 같습니다.
앞을 볼 수는 없어도,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거지라고 놀려도, 나는 짐짓 그런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구걸을 했습니다. 식구들이 나를 데려다놓으면, 거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내 앞에 지나가는 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면서, 도움을 청했지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요. 그게 내게 주어진 삶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니까요. 그런 면에서 나는 부끄럽지는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앞을 볼 수 있든 없든,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별로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두 눈이 뜨인 사람도 자기가 태어난 조건에 매여 살아가는 것 아닐까요? 그게 무언지 모르고서,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나름 열심히 살아가는 거라면,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내가 추해보이기는 하겠지요. 사람들이 볼 때, 내 모습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누구를 맘 아프게 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야 나라는 존재가 아픔이겠지만요. 어쨌든 나는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보다 좋지 않은 일을 더 많이 하며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참 억울하고 섭섭했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이 아닌데,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악하게 한 일도 없는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가진 장애를 두고 참 쉽게 말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장애의 현실은 그것만으로도 막막한데, 너무 함부로 판단하고 말한다는 느낌입니다. 참 잔인합니다. ‘당신이 내 아픔을 아느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당신들이 내 부모님의 고통을 아느냐?’고, ‘한 번 잠시라도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봤다면, 이렇게는 못할 거라’고 막 대들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훌륭한 분이라고 들었는데, 그저 소문이었나 봅니다. 그분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이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걸었던 기대도 접어야겠다고 마음에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정말 서러웠습니다. ‘예수님이라면 혹시 나를 고쳐줄 수 있지 않을까?’ 소원을 품어보긴 하였어도, 사실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있는 곳에 오실까? 나는 어디 가고 싶은대로 갈 수도 없는데, 그분을 만날 기회가 있을까? 그분이 나를 거들떠 보아주기라도 할까?’
그래도, 이제까지 예수님께 소망을 두었던 것은 그분만이 내게 희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그 가느다란 희망을 이제는 접어야 하는구나’ 하고 마음을 다잡자니, 내가 너무 불쌍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었겠지요. 뿐만 아니라, 내가 시각장애인이기는 해도, 청각장애인은 아니라는 사실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내 이야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자기 죄 때문일 거야.’ ‘아니야. 부모 죄가 커서 그래.’ ‘그럼 엄마, 아버지 중에 누구 죄가 더 클까?’
마침내, …… 예수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건 틀림없이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이 사람이 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또 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그 말씀은 나를 해방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말 때문에 멍든 내 가슴을, 그 말씀 한 마디가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음성은 폭삭 무너져내린 나를 일으켜 세우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의 죄 때문에도 아니다.” 내 가슴에서 통곡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내 부끄러움에서, 그리고 부모님에 대하여 가진 부끄러움에서 나를 건져주는 말씀이었습니다. 내 심장이 다시 뛰었습니다. 희망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아시는구나!’ 삶에 대한 의지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을 때, 나는 감격했습니다.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나타내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기 전까지, ‘나는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구나. 나는 유대인이면서도 하나님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이런 나를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걸 깨우쳐 주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입니다. 나는 누구의 잘못이나 실수로 지금 같은 조건에서 살게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펼치시는 특별한 계획 가운데서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습니다.
너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요청하기도 전에, 내 마음을 아셨나 봅니다. 갑자기 침뱉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조금 후에, 내 눈에 좀 차가운 느낌의 진흙 같은 것이 발라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오세요.”
고마우신 분!
마구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안고 실로암으로 갔습니다. 아직 볼 수 없는 나를 길안내를 도와주기 위해서 예수님 제자가 따라온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 앞이 보였습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세상을 밝은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니라.”
나는 이제 낮의 삶을 삽니다. 주님께서 당신 안에 있는 빛을 내게 비추어주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보내신 이의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으며 삽니다. 이것이 내게 영생하게 하는 양식을 줍니다. 이렇게 나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 감사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영원히 영원히 주님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나의 빛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영광이십니다. 주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