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칼럼> ‘말씀’하는 하나님, ‘사랑’하는 하나님

press to zoom

press to zoom
1/1

이상현 (목사, 밴쿠버밀알선교단 단장)

Oct. 1, 2017

‘기독교는 말의 종교’라는 말이 있다. 이 정리는 기독교는 말만 한다는 식의 조롱 섞인 비판과는 다른 주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당신의 말씀으로 운행하신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와 상황을 규정짓는다.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도 보면 표면적으로는 기적으로 그 모든 일을 이루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선언하고 요구하고 집행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 역사의 본질은 말씀에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그 말씀을 이렇게 대언하지 않았던가? “내 백성을 보내라”(Let go my people).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말씀하는 분이었다. 예수님의 3대사역을 ‘preaching, teaching, healing’ 라고 요약하는 것을 보아도 예수님은 말씀하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에 여러 특별한 사건들이 나타났는데, 그때에도 두드러지고 특징적인 현상 중에 하나는 방언을 한 것이었다. 성령 하나님도 말씀하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과 삶에 있어서 ‘말’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바울전도팀은 전도만 하고 바삐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진 지역을 다시 방문하여 교회(믿는 이들)을 돌아보고 위로하고 가르치고 강하게 하였다. 그 일을 주로 ‘권했다’고 표현하는데, 그 주요한 방법(수단)은 ‘여러 말’(many words)이었다.


‘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 우리 신앙에서 이성의 역할과 작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이성적 설명, 이성적 파악, 이성적 납득, 이성적 고백 등 ‘말’로 표현되고 ‘말’로 고백되는 것이 중심이 되고, 중요해진다. 이성은 합리성과 연결이 된다. 우리 신앙이 상식적이고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긍정적이다. 한편, 조심스러운 점은 기독교신앙에 있는 신비를 부정하거나 놓치게 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밀알사역을 하면서 감사하는 것 중에 하나는 기독교신앙에 대한 이해가 좀더 균형 잡히고 풍성해졌다는 점이다. (부족함이야 여전히 많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이해와 인간 이해가 달라졌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분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그 분의 행동이다. 그 분의 말이면서 동시에 그 분의 나타남이다. 그 분의 이성이면서 동시에 그 분의 사랑이다.


기독교 신앙체계에서 ‘말’(말씀)은 꼭 ‘말’만은 아닌 것이다. ‘말’은 그에 따르는 행동, 즉 사랑으로서 비로소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말’(이성)으로 표현되거나 설명되거나 고백되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어떤 내용이 전달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말씀)은 이성일 뿐아니라 사랑이며, 행동이며, 신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 같은 경우에는 기독교 복음을 말로 설명하고 전달하기가 어렵다. 눈높이를 맞춘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알아듣고 이해하는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신앙교육을 하기도, 반대로 자기가 믿는 바를 고백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장애인들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 같다. 성령께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파악하시고 특별한 방식으로 역사하신다고 믿어진다. 그들이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 아마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말’(말씀)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신비이기 때문이다.